그림 이중섭의 <달과까마귀>
웬일이냐
친구야 기다린다니 도대체 웬 말이냐
시계를 보니 자정이 훨씬 넘어섰는데
눈송이가 깃털처럼 이렇게 휘날리는데
뱃속에서는 드디어
한강철교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난다 친구야.
이제 오가는 이 아무도 없는데
악착스럽기보다도 순진하구나 친구야
쌓여 가는 눈만큼 세상은 텅 비어 가고
저 눈송이처럼 이리저리 섞이지 못하는 건
어떤 질긴 끈이 달린 사랑 때문이더냐.
무사히 풀려난 너를 보고 우린 신바람이 났는데
푹 꺼져 투명한 너의 눈을 보고
우리의 반가움은 죄책감과 부끄러움으로 떨었다.
친구야 그래도 늦게나마 우리는 곰곰이
생각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.
친구야 감정과 논리가, 눈물과 주먹이
그리고 이념과 생활이 똑 같은 태생이면서도
그 얼마나 양립시키기가 어려운 것인지,
얼마나 감정이 굳고 아름다워야 눈물과 주먹을
감싸안고 갈 수 있는 것인지,
생활이 얼마나 아름다워야 뜻이 불꽃처럼
순결할 수 있는 것인가를.
그렇다고 친구야 약속시간이 벌써
두 시간이 넘어섰는데 기다린다는 게 웬 말이냐.
적당하게 넘어가는 여유의 거짓이야
우리도 너무 잘 알지.
하지만 붐비는 바람이 이렇게
우리의 얼굴을 짓쪼며 지나가는데
밧줄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너의 웃음이
끔찍스럽다가는 드디어 내가 부끄럽구나 친구야.